※본 포스팅은 작품 이야기를 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때문에 개인적인 의견과 스포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립니다.
책장을 정리하다가 튀어나와서 읽게 됐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러시아 문학에 푹 빠져 있던 친구가 있었다.
‘고골’의 작품은 무조건 읽어야 된다고, ‘도스토예프스키’도 존경했던 작가라 말하던 게 생각난다.
그 말 듣고 샀던 거 같은데 왜 그때 안 읽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간략한 줄거리>
‘민음사’ 출판사에서 출간한 『외투』는 단편집으로 총 3편이 수록되어 있다.
「코」
8등관 ‘꼬발료프 소령’이 어느날 알 수 없는 이유로 본인의 코가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 다시 한 번 알 수 없는 이유로 코가 돌아올 때까지의 이야기.
「외투」
9급 관리 ‘아까끼 아까끼예비치’가 죽어라 돈을 모아 산 외투를 잃어버리는 이야기.
「광인의 일기」
9급 관리 “뽀쁘리시친’이 한 여자를 사모하다가 결국 정신이 나가버리는 이야기.
: 풍자의 귀재. 사회를 꼬집는 ‘고골’의 시선.
본 단편집에 수록되어 있는 세 작품 모두 거대한 부조리극이자 사회 풍자극이다.
세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하급 관리들이다.
또한 하나 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관리들의 허례허식과 딱딱한 수직적인 관료제.
그 관료 체계 안에서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속물적인 형상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짧은 소설 안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온갖 풍자들이 휘몰아친다.
작품 당 내가 재밌게 봤던 장면들을 하나씩 들여다보자.
「코」
정말 하루 아침에 ‘꼬발료프 소령’의 코가 사라졌다.
어느날 사라졌던 ‘코’는 본래 주인인 ‘꼬발료프 소령’보다 상급인 5등관의 모습을 취하고 돌아온다.
‘꼬발료프 소령’이 고군분투해 어찌 저찌 5등관이 된 ‘코’를 만나지만,
5등관이기에 말도 제대로 못 걸고 벌벌 떨다 코를 다시 놓치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외투」
항상 허름한 외투를 입었던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같은 직장 동료들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다.
작 중 똥파리보다도 무관심이라고.
결국 돈을 꾸역꾸역 모아 비싸고 이쁜 외투 하나를 입고 나타나자 과장스러울 정도로 바뀌는 주변인들의 모습들.
그 외투를 잃어버리자 다시 투명인간 취급으로 돌아간다.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는 사라져버렸고, 바로 다른 사람이 그 빈 자리를 대신하는 장면도 참 재밌었다.
「광인의 일기」
딱히 한 장며이라기보다는 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승진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애를 쓴다.
그렇게 한 여자를 사모하다 차근차근 그라데이션으로 미쳐가는 일련의 과정들도 흥미로웠다.
19세기 작품임에도 촌스럽거나 사회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없이 매끄럽다.
아마 관료제라는 것이 그만큼 변화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짧은 작품임에도 허투루 쓰이는 장면없이 내용이 가득 담겨 있어 포만감이 대단했다.
풍자나 희화화는 유쾌함와 불쾌함 딱 그 사이에서 얼마나 선을 잘 타는지가 중요하다 생각한다.
‘풍자’라는 이름 아래 고삐를 풀어버리면 오히려 눈쌀 찌뿌려지기 마련이다.
본 작품들은 크게 불편한 것 없이 그러한 부분이 잘 이루어진 것 같다.
21세기까지 쭉 이어져 오는 그 딱딱하고 우스운 사회적인 모습들을 잘 꼬집어냈다.
: 풍자 안에서 생생히 움직이는 인물들.
단순히 풍자로 도배되어 있었다면 이 작품이 그리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
‘고골’의 작품이 특히 재밌었던 것은 인물들의 묘사가 굉장히 사실적이라는 점이다.
‘돈’이라는 개념과 ‘산업혁명’이 이루어진 이후 우리는 ‘자산’이란 가치에 더욱 얽매이게 됐다.
현대에 들어서는 ‘SNS’의 발전으로 더욱 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우월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더 이상 뻬쩨르부르그에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누구의 보호나 사랑도 받지 못하고, 흔한 파리 한 마리조차 놓치지 않고 핀으로 꽂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자연 관측자의 관심마저 끌지 못했던 존재가 사라졌다.
—「외투」94쪽.
여전히 다른 형태로 유지되는 듯한 계급 사회.
그 안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옆사람에 미소를 짓다가도 뒤를 돌면 차갑게 정색하는 모습.
또는 아예 관심조차 주지 않는 현실.
또는 옆 사람은 나보다 좋은 걸 입는지, 뭘 먹는지, 뭘 타는지 은근히 다 지켜보면서 아닌 척.
사실보다 소문에 더욱 관심을 보이는 대중들.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들.
인물을 넘어서 ‘인간’에 대해 차갑게 꿰뚫어보는 ‘고골’의 시선은 참 날카로웠다.
그런데 신분이 높은 그자들의 아버지들은 저마다 팔방미인으로, 궁중에 드나드는 패거들이다. 각자 자기들만이 애국자인 양 떠든다. 이 애국자들은 임대료를 원한다. 야심가요, 배신자들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머니나 아버지, 아니 하느님까지도 팔아넘긴다!
—「광인의 일기」129쪽
이런 시선이 있었기에 단순히 웃음을 자아내는 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피어오르는 씁쓸함의 진함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현실의 지독한 형태를 환상적인 코드로 한 단계 비틀어 은은하게 현실의 모습을 녹여냈다.
그렇기에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임에도 터무니없게 지나가는 게 아니라
더욱 집중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여전히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의 가치가 중요한 이유를 이 작품이 보여주지 않았을까?
: 연극으로도 만나보고 싶은 작품.
책을 덮은 뒤 전해져 오는 깊은 여운을 보낸 뒤 떠오른 생각은
‘연극’으로 보면 얼마나 재밌을까? 라는 생각이었다.
비교적 길지 않은 이야기.
많지 않은 인물의 수.
환상적인 스토리.
과장스러운 인물들의 움직임.
연극으로 만나봤을 때 재밌게 작동할 요소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때문에 연극으로서의 이 작품들은 어떻게 변주를 줄 수 있을까 너무 궁금했다.
작품 외적으로 다른 시선으로 2차 창작할 수 있는 여지도 있기에 창작자의 역량에 따라 새롭게 각색도 될 것 같다.
또 이런 풍자나 부조리는 역시 ‘극’으로 봐야 그 맛이 또 나기도 하니까.
어쩌다 서울에서 멀어지고 연극장을 잘 찾아가지 못 하고 있어 그 갈망이 더욱 짙은 것 같기도 하다.
생각난 김에 찾아보니 곧 「외투」의 연극이 시작되는 것 같다.

알고 쓴 건 아닌데 조만간에 한다.
기회가 된다면 꼭 보러 가고 싶다.
쭉 찾아보니 외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각색되었으니
하나씩 찾아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