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매일 : 2020년 2월 18일
<트랙리스트>
01. 심야행 (title)
02. 집에
03. 이방인
04. 눈 (title)
05. 엉
06. 덩
07. 이
이 앨범이 하고자 하는 말은 앨범 소개에 아주 친절하게 되어있다.
‘[비적응]은 적응에 맞서는 대안적인 삶의 태도를 제시한다. 사회로부터 주어진 가치에 무비판적으로 적응하지 않고 무엇인가가 건강한지 병들었는지, 착한지 나쁜지, 혹은 아름다운지 추한지에 대해 스스로의 기준을 갖고 판단하는 것이다.
동시에 비적응은 부적응에 맞선다. 적응하지 못한 채로 남아 사회와의 공존을 포기하는 부적응과 달리 스스로 적응하지 않음을 선택하는 비적응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추구한다.’
재밌는 표현이다.
‘사회부적응’이라는 말은 흔하게 사용되지만, ‘사회비적응’이라는 말은 없지 않은가.
혹여나 있다한들, 그게 보편화된 말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새소년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닌 ‘안’하는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꼭 이 사회에 발 맞추며 적응하는 삶을 따르지 않는다고.
“남들처럼 사는 게 정답은 아니라곤 하나 보편적인 길인 건 맞다.”
“표정관리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피곤하게 살 성격이다.”
우리는 사회성이라는 이름 하에 정해진 규율과 보편성에 맞춰 살아간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틀 안에 ‘나’의 몸을 깎아가며 끼워 맞춘다.
그 결과, ‘나’라는 고유성이 퇴색되기도 한다.
내 마음을, 내 꿈을, 내 개성을 잃기도 한다.
분명히 그 안에는 ‘나’만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의적인 ‘비’적응을 선택하고
‘나’의 가치를 찾아가는 청춘의 구슬픈 앨범처럼 들린다.
또는 종래에는 오히려 속 시원한 해방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가사적인 부분을 더 자세하게 들어가보자.
초반 <심야행> – <집에> – <이방인>으로 이어지는 트랙은 되게 쓸쓸하다.
심야. 어두운 밤.
가야 할 곳도, 돌아갈 곳도 모르는 화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디쯤 왔을까 우리의 밤은 어딜까
1번 트랙 <심야행> 中
알수록 모르겠는 건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2번 트랙 <집에> 中
갈수록 더 아득해지는 건 자, 돌아갈 곳은 어디?
그런 화자의 길잡이 역할을 해줄 하늘의 별은 모두 자취를 숨겼다.
오직 도시의 빛만이 매우 밝게 빛나고 있지만, 그 빛이 자신의 빛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사회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상황처럼 보인다.
때문에 화자는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느낀다.
난 아무도 모르는 얘길 하고
3번 트랙 <이방인> 中
네 초점없는 눈 사이로
난 갈 곳이 없었지
<이방인> 후반부 모든 밴드 세션이 빠지고 홀로 남은 보컬의 허밍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서러움이 짙게 드러난다.
다음 트랙인 <눈>에서 화자의 고독과 방황이 극에 달한다.
앞선 세 트랙보다 곡의 분위기는 한층 울적해진다.
화자는 스스로 겨울 같다고 한다.
‘하얗고 차가웁게’
차가울지라도 새하얀 화자는 여전히 갈 곳도, 빛도 찾지 못하고 애타게 사랑을 찾는다.
사랑, 나는 아직 어둠
4번 트랙 <눈> 中
가여이 여기어주오
미안한 말이지만
저기서 잠시 기다려줄래요
여기서 중요한 점은
화자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을 하는 것이지,
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세상과의 관계에서 혼란을 겪고 ‘나’의 가치를 찾지 못해 고독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3번 트랙 <이방인>부터 ‘너’의 시선을 느끼고, ‘너’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다.
여기까지 편의상 ‘나’의 고독과 방황이라는 1부라 지칭한다면,
5번 트랙부터는 비적응을 선택한 이후의 이야기를 담은 2부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2부에 들어서면서 곡의 흐름이 완전히 반전된다.
사람 사는 거 관심없어요
5번 트랙 <엉> 中
떨어지는 네 모습을 봐요
토실토실 웃어버렸어요
오늘의 농담 재미있지요
멋대로 춤 출 때
6번 트랙 <덩> 中
노래를 부를 때
모두 날 피하고
내 몸에 리듬이 흐를 때
엉덩이 흔드네
아무도 누구도
나와 함께 웃지 않아요
혼자서 이 밤 끝
도시의 밤 아래서 춤추네
2부에서의 ‘나’는 남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네’가 울 때조차 ‘나’는 오히려 웃음을 짓고, 그 농담을 재밌어한다.
‘나’는 혼자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지만,
남들은 그런 ‘나’를 피하고, 같이 웃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곡의 분위기는 밝다.
부적응으로 인한 혼자와 비적응을 택함으로써 된 혼자는 전혀 다른 모습 같다.
1부에서 화자는 이방인으로 느껴질 정도로 외롭고 밤에서 서성거리지만,
이제는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자기가 나아갈 길을 나아간다.
남들이 이럴 땐, 이렇게 해야 돼! 라고 하는 틀에도 박히지 않은 채.
비로소 ‘나’를 찾은 화자의 모습.
이제 앨범의 클라이맥스로 진입한다.
3분 가량의 곡임에도 보컬의 가사는 단 4줄에 불과하다.
나머지 공간은 밴드 사운드로 꽉꽉 채웠다.
곡의 분위기는 1부의 쓸쓸함도, 2부의 발랄함과도 다른 느낌이다.
마치 일종의 ‘해방감’에 가까워보인다.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후 ‘나’라는 가치를 찾은 화자가 느끼는 감정이었을까?
페스티벌에서 다같이 리듬에 몸을 맡기고 정신없이 춤을 추는 광경이 머리에서 그려진다.
마음이 부족하네
7번 트랙 <이> 中
마음이 다 타버렸네
절망이 여기 있네
우리 완벽한 절망이네
반면에 가사에 쓰이는 단어는 곡의 분위기와는 상반된다.
마음이 다 타버렸네. / 절망이 여기 있네.
이 가사들이 뜻하는 건 뭘까?
재밌는 문장이다.
‘절망한다.’는 문장이 아니라, ‘절망이다.’라고 한다.
우리가 절망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절망 그 자체가 되었다.
사회에서 비적응을 택한 화자는 삶의 방향에서 대안을 얻었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의 시선 안에서 ‘절망’이 된 건 아닐까?
사회의 통념 안에서 화자는 ‘절망’이 되었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면 오히려 ‘완벽한 절망’이라고 한다.
‘비적응’이란 건 사회에서는 달가운 방법은 아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적응력을 거부하는 행위임으로.
하지만 사회가 요구하기 전 ‘나’를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 안에서 ‘나’의 가치를 먼저 찾아야 했다.
때문에 ‘부적응’으로 패배적으로 끝나는 게 아닌, ‘비적응’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후에야
비로소 ‘나’는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혼자서도 재밌는 농담을 하며 춤을 출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회의 통념 속에서 ‘절망’이 될 지라도 좋은 게 아닐까?
이런 화자의 마음을 피날레를 장식하는 <이>의 페스티벌 한복판에 있는 듯한 사운드로 표현한 게 아닐까?
또 하나 재밌는 구조는
화자의 시선이 앨범이 진행됨에 따라 ‘나’에서 ‘너’로, 그리고 ‘우리’로 확장된다.
<심야행>과 <집에>에는 ‘나’라는 1인칭에 집중한다.
오로지 ‘나’에 대한 이야기만 한다. ‘나’의 고독과 방황을 말한다.
<이방인> 후반부에 들어서야 ‘나’의 시선은 ‘너’로 옮겨간다.
‘너’의 초점 잃은 눈을 보고, ‘너’에게 기다려달라고 한다.
비적응을 택함으로써 ‘나’는 ‘나’로서 존재하고, ‘너’와 함께 ‘우리’로 완성된다.
다시 말해, 개인의 내면(나)에 머물던 시선이 타인(너)을 거쳐 세상이나 관계(우리)로 넓어지는 과정을 말한다.
그 과정에서 화자가 택한 것은 ‘비적응’이었다.
‘비적응’을 통해 마침내 ‘나’에 대한 반황을 끝마치고, ‘너’를 마주하며 ‘우리’라는 관계를 비로소 완성한다.
이 연대의 시작점에서 삶은 다시 출발한다.
설령 세상이 이를 두고 절망이라 손가락질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기꺼이 ‘완벽한 절망’이 되겠노라 선언을 하면서.
음악적인 부분은 말해 뭐한가.
내가 밴드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곡의 공간을 오직 보컬의 목소리로 채우는 게 아니라,
다양한 악기 연주가 곡의 주인공이 되어 사운드로 또 다른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너무 좋다.
<심야행>은 보컬이 빠진 후에 새벽 밤 공기 속을 서성이는 쓸쓸한 정서를 밴드 사운드로 밀도 있게 그려낸다.
<이>는 보컬이 오히려 감초 역할에 머물고, 다른 밴드 사운드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반대로 <이방인>처럼 밴드 세션이 보컬에게 완전히 공간을 내줌으로써 극적인 대비를 만드는 감각 역시 짜릿하다.
비우고 채우며 귀가 너무 즐거운 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