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의 리뷰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에반게리온을 보는 법 : AT필드와 인간관계의 고뇌.

※본 포스팅은 작품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때문에 개인적인 의견과 스포가 매우 매우 매우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립니다.

사진 출처 – ©カラー/Project Eva. (구글 이미지 인용)

1995년에 방영되어 30년도 훌쩍 지난 지금까지 언급되고 사랑 받는 작품.
<신세기 에반게리온>

하지만 그 명성 하나만 듣고 찾아 보면 머리 속에 거대한 물음표만 남는다.
난해한 스토리, 난해한 메세지, 난해한 감정선, 난해한 캐릭터.

나름대로 이 작품을 정리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오늘은 TVA 오리지널 시리즈와 <앤드 오브 에반게리온(약칭 EOE)>를 중심으로
세계관 – 스토리 – 메세지 순서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무식하게 글이 길어질 수도..


<간략한 줄거리>

2000년, 인류는 대재앙 ‘세컨드 임팩트’로 지구 환경이 격변하고,
이어진 전쟁과 기아 등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이 사라졌다.

15년이 지난 현재.

지하 요새 도시 ‘제3신동경시’에 ‘사도’라는 정체불명의 적 ‘사도’가 습격해온다.
이들의 목적은 또 다른 대재앙 ‘서드 임팩트’를 일으켜 인류를 전멸시키는 것.

인류의 기존 무기로는 ‘사도’에게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특무기관 ‘네르프’는 생체 병기 ‘에반게리온(약칭 에바)’을 출격시킨다.

‘에바’에 탑승하게 된 이들은 겨우 중학생의 소년 소녀들.
각각의 결핍을 안고 있는 이들은 ‘에바’에 올라 ‘사도’와 힘겨운 싸움을 이어간다.

점차 세계의 비밀이 드러나고, 인류의 운명은 점차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본 작품이 난해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순히 세계관이 복잡해서가 아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계관.
그 세계관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그 이야기 안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의 감정선.
결국 이 세계관, 이야기, 인물들로 하여금 말하고 싶은 메세지.

다시 말해, 배경/사건/인물/메세지 하나부터 열까지 뭐 하나 직관적으로 표현되는 게 없다는 점이다.

더불어 세계관과 설정 역시 TVA 하나만으로 모두 설명되지 않는다.
극장판, 만화판, 게임 등 다른 매체에서 보완되거나 서로 다른 해석이 제시되기도 한다.
때문에 TVA만 보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서드 임팩트가 그래서 뭔데? 사도랑 에바의 정체가 도대체 뭔데?’
‘인류보완계획이 그래서 뭔데? 쟤네는 목적이 도대체 뭔데?’
‘TVA 25-26화, EOE는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쟤네는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데?’

간략하게 세계관에 대한 정리를 마치고, 작품이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에 집중하려고 한다.

: 세계관에 대한 해석, ‘퍼스트/세컨드/서드 임팩트’.

‘퍼스트 임팩트’

작중 ‘세컨드 임팩트’에 대한 이야기가 주구장창 나온다.

여기서 질문.
‘세컨드’라면 ‘퍼스트’도 있다는 건데 ‘퍼스트 임팩트’는 언제 일어났을까?

본래 이 지구는 인간의 행성이 아니었다.

숫자로 표현하기도 힘든 아주 먼 옛날.

흔히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초월적인 존재 ‘제1시조민족’
우주 곳곳에 본인과 닮은 ‘생명의 씨앗’을 퍼트렸다.

‘생명의 씨앗’이 바로 우리가 아는 ‘사도’의 근원이다.

‘제1시조민족’은 무한한 동력원인 ‘생명의 열매’와 고도의 지성의 ‘지혜의 열매’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자신과 완벽히 동일한, 신에 필적하는 존재가 탄생하는 것을 경계했기에
각 씨앗에는 단 하나의 열매만을 부여했다.

또한 서로 다른 열매를 지닌 두 씨앗이 한 행성에서 만나 결합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통제 장치이자 안전장치인 ‘롱기누스의 창’을 함께 동봉했다.
만약 한 행성에 두 씨앗이 불시착할 경우,
늦게 온 씨앗의 ‘롱기누스의 창’이 발동해 스스로 봉인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원래 지구는 ‘생명의 열매’를 지닌 ‘아담’이 도착하여 ‘아담의 자손’(현 시점 등장하는 ‘사도’)들이 번성하였으나,
무언가 잘못 되었는지 ‘지혜의 열매’를 지닌 ‘릴리스’도 지구에 들어오게 된다.

만나면 안 되는 두 존재가 결국 한 행성에서 충돌하며 발생한 1차 대폭발.
TVA에서는 직접 설명되지 않지만, 후속 설정과 공식 자료에서 이를 ‘퍼스트 임팩트’라 부른다.

퍼스트 임팩트‘의 결과.
‘제1시조민족’의 설계대로 ‘아담‘과 ‘릴리스’ 각자의 ‘룽기누스의 창’이 발동.

규칙대로라면 늦게 온 ‘릴리스’‘롱기누스의 창’이 발동해야 했으나,
‘릴리스’의 ‘룽기누스의 창’은 충돌의 영향으로 파괴되거나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이에 지구의 시스템은 오류를 일으켰고,
도리어 ‘아담’의 ‘롱기누스의 창’이 발동되어 ‘아담’과 그의 자손(‘사도’)들을 동면시켜 버린다.

주인(‘아담’)이 잠든 이 지구는 ‘릴리스’의 피(작중 ‘LCL’)로부터 생명체의 번성을 이루었다.
그 번성 끝에 탄생한 존재가 바로 지금의 ‘인류’(작중 ‘제18사도 릴림’)을 포함한 지구의 생물들이다.

즉,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정체불명의 괴수가 인류를 습격하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본래 원주민인 ‘아담’의 자손인 ‘사도’들의 땅에
‘릴리스’의 자손인 ‘인간’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었다.

모두가 같은 ‘사도’들이었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원래 아담계 생명체가 번성했어야 할 지구에서 살아가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동면에 이르렀던 ‘사도’들은 어떻게 다시 눈을 뜨고 ‘인간’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었을까?

‘세컨드 임팩트’

사실 남극에 소형 운석이 충돌하여 일어났다는 세간의 발표는
정부와 ‘제레(작중 뒤에서 세계를 주무르는 비밀조직)’에 의해 철저히 조작된 거짓이었다.

‘릴리스’의 자손이 지구에서 왕성하게 번성하는 동안,
‘아담’과 그의 자손들은 수십 억년 동안 룽기누스의 창에 꽂힌 채 잠들어 있었다.

서기 2000년.
‘미사토’의 아버지, ‘카츠라기 박사’‘제레’의 후원을 받아
탐사대를 이끌고 남극에서 ‘아담’을 찾아낸다.

이들은 ‘아담’을 통제하고 분석하기 위해 인간의 유전자를 이용한 접촉 실험을 강행.
그 과정에서 봉인이 풀린 아담이 폭주하고, 이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남극 대륙이 증발시킨다.
결과적으로 세계 인구 절반이 소멸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게 ‘세컨드 임팩트’의 진실이다.

그후로 15년이 지나, ‘아담’의 자손들인 ‘사도’들도 점차 잠에서 깨어나
인류에게 거대한 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본 이야기가 막을 올린다.

‘서드 임팩트’

그렇다면 당장 인류를 위협하는 ‘사도’의 목적이 단지 ‘서드 임팩트’ 그 자체일까?

‘서드 임팩트’는 사실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아담계 생명체(‘사도’)와 릴리스계 생명체(‘인류’)가 특정 조건 아래 융합하며 발생하는 대재앙이자,
지구의 현 생태계가 완전히 초기화되는 것을 지칭한다.

‘사도’‘인간(‘릴림’)‘을 공격하는 이유는 무지성적인 파괴나 ‘서드 임팩트’의 발발 자체에 있지 않다.
본래 자신들이 주인이었어야 할 지구를 되찾기 위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과정에 가깝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비밀 조직이자 사실상 세계의 흑막인 ‘제레’와 그 아래 ‘네르프’
왜 그토록 ‘서드 임팩트’에 집착하는 걸까?

그 이유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가장 중요한 풀롯이자 핵심인 ‘인류보완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부터 그 ‘인류보완계획’이 무엇이며, 왜 작품의 핵심인지 살펴보려 한다.

: 스토리에 대한 해석, 세 개의 ‘인류보완계획’.

‘인류보완계획’은 단어만 봐서는 인류를 보호하기 위한 계획 같지만 그 실상은 전혀 다르다.
‘릴리스’의 피로부터 탄생한 인류(‘릴림’)를 다시 ‘릴리스’라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 회귀하자는 계획이다.

그리고 작품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머리가 아픈 이유는
모두가 ‘인류보완계획’을 말하고 있지만, 그 주체에 따라 그 계획이 의미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릴리스’로 회귀한다는 과정은 동일하나,
‘인류보완계획’을 실행시키려는 이유과 바라보는 지점이 서로 다르다.

‘인류보완계획’은 크게 3가지 버전으로 나뉜다.

  1. ‘이카리 신지’의 어머니, ‘이카리 유이’의 버전
  2. 세계의 질서를 관장하는 비밀조직 ‘제레’의 버전
  3. ‘이카리 신지’의 아버지, ‘이카리 겐도’의 버전

● ‘이카리 유이’의 버전

‘세컨드 임팩트’의 여파를 직접 경험한 ‘이카리 유이’는 확신했다.
사도에 의해서든, 인류에 의해서든 ‘서드 임팩트’는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따라서 연약한 ‘인류(릴림)’는 종말을 피할 수 없을 거 판단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으며, 살아있기만 하면 누구나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카리 유이’가 남긴 대사를 살펴보면
그녀는 사람은 행복할 권리가 있고, 살아만 있다면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행복할 권리 이전에 ‘생존’에 대한 숙제를 해결해야 했다.

언젠가 찾아올 ‘서드 임팩트’를 대비하여 ‘이카리 유이’는 자신만의 ‘인류보완계획’을 구상했다.

그녀는 ‘릴리스’를 베이스로 하는 ‘에반게리온 초호기’를 거대한 방주로 삼았다.
인간을 개개인으로 고립시키던 마음의 벽(‘AT필드’)를 허물고 새로운 ‘릴리스’의 육체로 회귀.
‘서드 임팩트’를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단일 개체로 통합되기를 기원했다.

그리하여 ‘에반게리온’이라는 불멸의 육체에서 하나가 된 인류는 ‘생존’이라는 숙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릴리스’ 그 자체가 되어 영원히 존재를 증명하는 생명의 증거를 우주에 남기는 것.
이것이 ‘이카리 유이’가 설계한 계획의 종착지였다.

● ‘제레’의 버전

‘이카리 유이’의 초기 ‘인류보완계획’을 접한 ‘제레’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제레’는 이 세계를 배후에서 관장하는 권력의 꼭대기에 위치한 존재다.

이들은 훨씬 종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 계획에 접근했다.

태초의 역사인 ‘퍼스트 임팩트’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이 ‘제레’는
현재 인류(‘릴림’)은 진정한 지구의 주인이라 인정하지 않았다.
인류의 번영은 ‘릴리스’의 불시착으로 인한 오류의 결과물일 뿐이었다.

그 대가로 지구의 진짜 주인이었어야 할 ‘아담’과 그의 자손들을 동면시키고 밀어냈다.
그것은 일종의 인류(‘릴림’)의 씻을 수 없는 ‘원죄’라는 논리였다.

여기서 ‘제레’라는 집단이 보여주는 오만함이 ‘인류보완계획’을 수정한다.

인류가 원죄를 지녔다면 우리가 그 원죄를 깨끗하게 씻어내고,
태초의 오류를 바로잡은 후 진정한 지구의 주인이 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인간의 결핍이라는 불완전한 요소를 제거하여
인류를 하나의 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불완전성을 극복하려 한다.

그렇기에 ‘서드 임팩트’를 고의로 불러일으킨 후 ‘인류보완계획’을 실행.
인류가 태초의 ‘릴리스’로 회귀하여 ‘신’이라는 존재가 되어 완전한 지배자가 되기를 바랐다.

오류로 비롯된 시작을 강제 리셋한 후
개별적인 자아를 가져 고립되는 ‘릴림’을 다시 하나로 모아 완벽한 단일 ‘신’이 되려는 오만함.
이게 ‘제레’의 버전이다.

● ‘이카리 겐도’의 버전

‘이카리 겐도’‘인류보완계획’은 허무할 정도로 단순한 이유였다.

그는 그저 본인의 동반자 ‘이카리 유이’를 너무나 사랑했을 뿐이다.

‘제레’의 귀에 초기의 ‘인류보완계획’이 들어가면서 ‘이카리 유이’는 신변에 위협을 받는다.
그녀는 결국 ‘릴리스’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에반게리온 초호기’ 속으로 들어가 나오기를 거부한다.

‘이카리 유이’가 ‘에반게리온 초호기’ 속으로 사라진 후,
‘이카리 겐도’가 ‘이카리 유이’의 ‘인류보완계획’을 계승한다.

‘이카리 유이’와 가는 방향은 표면적으로 동일하지만, 본질적인 의도가 전혀 달라지게 된다.

‘겐도’는 ‘유이’처럼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대승적인 목적도,
‘제레’처럼 신이 되어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오만함도 없었다.

단순히 ‘인류보완계획’이 성공하면 전인류는 ‘에반게리온 초호기’에서 하나가 될 것이고,
먼저 ‘에반게리온 초호기’에 들어간 ‘이카리 유이’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하나뿐이었다.

‘겐도’는 그냥 ‘유이’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에게 ‘인류보완계획’은 거대한 인류의 미래가 아닌, 단 한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한 수단이었다.

사진 출처 – ©カラー/Project Eva.

그러나 정작 이 거대한 계획 속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되는 사람은
이카리 유이’도, ‘제레‘도, ‘이카리 겐도’도 아니었다.

모든 종착점에는 어린 소년 ‘이카리 신지’가 있었다.
결국 이 각기 다른 3명의 ‘인류보완계획’ 때문에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고통받고 희생당하게 된다.

: 작품에 대한 해석, AT필드와 사랑의 연대기

한 문장으로 말하면 본 작품은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작품에서 제일 중요한 용어가 바로 ‘AT필드’다.

각 사도들은 이 ‘AT필드’를 지닌다.
쉽게 말하면 각자만의 영역 같은 것이다.

이 영역이 있기에 개인이 개인으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로지 본인만의 영역이기에
타인과 절대로 융화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벽을 형성한다.

우리 인류도 결국 ‘릴림’이라는 사도이기에 연약하나마 이 ‘AT필드’를 지닌다.

우리는 이 ‘AT필드’ 때문에 남과 싸우고, 상처를 받고,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혐오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우울하다.

그렇다고, ‘인류보완계획’이 실행되어 인류의 ‘AT필드’를 해제시키고,
인간들이 개개인의 독립성과 개성을 상실하고 하나의 영혼으로 묶이는 게 정답일까?

실현된다면 분명 우리는 갈등을 느낄 일이 없을 것이다.
마치 전체주의의 지배를 받는 사회처럼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할 것이니까.

그렇다면, 그게 과연 산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라는 하나밖에 없는 존재성을 저버리고 그저 생존만 할 뿐이다.

주인공 ‘이카리 신지’는 어둡고, 겁이 많고, 자존감이 낮고, 스스로를 쓰레기라 생각하고,
남들이 본인을 쓰레기라고 말해도 “맞아. 난 쓰레기야.”라고 하는 자기 혐오적인 인물이다.
허무하고, 공허하고, 우울하고, 패배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런 ‘신지’가 모종의 사건들을 겪고, 극이 진행됨에 따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스카’에게도, ‘레이’에게도, ‘미사토’에게도 멀어져 결국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환상 속에서 ‘아스카’의 목을 조르며 ‘인류보완계획’을 실행한다.

실행되는 과정 중 ‘이카리 신지’의 심리 묘사가 드러나는 장면이
TVA판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두 편이다.

이 심리묘사와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인간들이 ‘AT필드’를 유지하여
‘나’라는 존재를 지킴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타인 사이에 세워지는 보이지 않는 벽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뇌가 드러난다.

내 표현으로는 결국 ‘사랑’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연히 연인 간의 좁은 의미에서의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보더 더 넓은 범위의 사랑이다.

친구 사이의 우정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사랑의 한 형태라 볼 수 있다.

이 사랑이 있기에 인간은 사람이 되어 사회적인 동물이 된다.
혼자 ‘AT필드’에 갇혀 지내는 것이 아닌,
친구를 만들고, 교류하고, 놀러 가고, 감정을 공유하며 죽을 때까지 연대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사랑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다시 ‘나’와 다른 존재인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사랑과 연대에 다가갈 수 있다.

극이 종착지로 향할수록 작품은 더욱 난해한 연출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연출 속에서 결국 말하고자 한느 것은 ‘사랑’이며,
‘레이’, ‘미사토‘, ‘아스카’ 세 인물을 통해 그 의미를 탐구해 나간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친 끝에 ‘이카리 신지’‘인류보완계획’이라는 완전한 융합이 아닌, 다시 상처받을 수 있는 현실을 선택한다.
그 현실이야말로 ‘나’ ‘너’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세계였기 때문이다.

‘이카리 신지’도 많은 결핍을 지닌 인물인 만큼
다른 세 인물 ‘아야나미 레이’, ‘카츠라기 미사토’,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도 각기 다른 결핍을 지녔다.

세 인물은 서로 다른 결핍을 지녔지만, 모두 부모에게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작품은 이들의 결핍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사랑을 배우며,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지를 탐구한다.

사랑 이전의 생존과 존재성

‘아야나미 레이’ ‘이카리 유이’의 유전자로 만들어진 클론으로, 온전한 인간이 아니다.
1호가 죽으면 2호가 태어난다.
2호가 죽으면 다시 3호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레이’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으로 살아왔다.
그 내면에는 도구가 아닌, 단 하나의 주체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자리하고 있다.

이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도망가기 위해 ‘AT필드’를 해제하여 개개인의 독자성을 놓는 게 맞을까?
그건 정신적인 죽음과 다름없지 않을까?

너희라면 ‘인류보완계획’에 탑승할 것인가?
상처 받더라도 ‘AT필드’를 유지하며 ‘나’라는 존재를 지켜낼 것인가?

정신이 배제된 육체적 교감, ‘반쪽짜리 사랑’.

‘카츠라기 미사토’는 여러 결핍을 지닌 세 인물,
‘신지’,’아스카’, ‘레이’를 관리하는 책임자로 나온다.

하지만 이 인물 역시 어린 시절부터 결핍을 지닌 채 성장한 캐릭터다.

(사랑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편의상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 이분법적으로 나눠 볼까 한다.)

‘미사토’는 여러 사건과 가정사 영향으로 ‘사랑’에 있어 정서적인 교류를 원활히 하지 못한다.
타인과 마음을 여는 방법을 몰라 두려운 나머지 육체 관계로 뒤로 숨은 결핍된 인물이다.

전 애인이었던 ‘카지 료지’와의 관계에서도 육체적인 교류는 여전히 나누지만,
그에게서 죽은 아버지를 겹쳐 보며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자신이 무서웠기에 결국 이별을 택했다.

다시 말해, ‘미사토’는 타인과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육체적 접촉을 자신의 사랑 표현 방식으로 착각하거나 의존하게 된 인물이다.

최후반부 극적으로 심적 문제를 겪는 ‘신지’에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어.”라며 ‘신지’의 손을 잡는다.

‘신지’는 이런 건 싫다며 ‘미사토’를 밀어낸다.
(‘신지’는 ‘미사토’의 이런 행위를 성적 암시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미사토’는 심리적인 교감을 위한 사소한 스킨쉽이었을까?)

물론 육체적인 사랑이 없는 사랑이 완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은 쉽게 할 수 없다.
(플라토닉 러브가 존재하지만은.)
그럼에도 육체적 교감만 있는 사랑이 과연 온전할까?

‘미사토’라는 인물을 통해 정신적인 사랑이 배제된 채,
육체적 교감으로 감정의 공백을 메우려 했던 사랑을 하는 ‘반쪽짜리 사랑’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런 반쪽으로는 우리 인간 사이에 놓인 ‘AT필드’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극 중 ‘미사토’가 결국 ‘카지 료지’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 하고,
‘신지’도 ‘미사토’의 손길을 거부한 것을 보아 이 방법은 옳은 방향이 아니라 말하는 게 아닐까?

일방향을 거부하는 쌍방향의 사랑

‘소류 아스카 랑그레이’는 신지의 내면 성장을 자극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마지막 ‘신지’의 심리 묘사에서도 주된 히로인으로 나온다.

작 중 갑자기 ‘아스카’가 ‘신지’에게
“우리 키스해보지 않을래?”라고 말한다.

이 제안은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니다.
타인과 어른스러운 관계를 맺고 인정받고 싶어 했던 충동적인 결핍의 결과였다.

그러나 ‘신지’는 ‘아스카’의 이 미숙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말을 안 해주는 거야? 이해할 수 없어.”라며
타인의 벽을 넘지 못하고 다시 스스로의 벽에 가둬지고 만다.

“나도 노력했어.”라는 ‘신지’.
그런 ‘신지’에게 ‘아스카’가 말한다.

너가 입원해 있는 나를 보고 자위한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다시 말해, ‘신지’는 현실의 ‘아스카’라는 인격을 마주하기보다 그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랠 도피처로만 삼았다.

여기서 다음 장면, 그럼에도 ‘아스카’ ‘신지’에게 너의 전부를 원한다고 말한다.
즉, 그대로 ‘신지’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육체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관계도 원함을 말한다.

다만, 이 장면은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 전개되기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장면의 흐름에서 사랑은 정서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이 같이 존재해야 함과 동시에
‘사랑’은 일방적인 게 아닌, 쌍방으로 오가야 진정하게 거듭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가페의 환상에서 현실의 타인으로

‘신지’는 무결하고 무조건적이고 아가페적인 사랑을 일방적으로 원하기만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사랑해 주느냐가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것이었다.
그게 ‘미사토’든, ‘아스카’든, ‘레이’든.

그렇기에 ‘신지’에게 진심이었던 ‘아스카’에게 마지막으로 찾아갔을 때 ‘아스카’는 ‘신지’를 밀어낸다.
너는 결국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거 아니냐면서.
쌍방으로 상호적이지 않은 일방향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대로 ‘신지’는 ‘아스카’에게마저 밀려나고 폭주한다.
본인이 그렸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타인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신지’.
원래 성격대로 도망치는 걸 선택했고, 그게 나와 타인의 개념이 사라지는 ‘인류보완계획’이었다.

계획이 실행되는 와중에 계속해서 ‘미사토’와 ‘아스카’, ‘레이’의 환상을 만나며
‘사랑’에 대해 다시 고뇌하게 된다.

타인의 공포란 정말 극복할 수 없는 걸까?
거기서 도망치면 낙원이 있을까?
이 모든 게 현실일까?
‘아스카’가 나를 죽어도 싫다고 했던 이유와 뜻은 무엇이었을까?

많은 질문과 대화 끝에 결국 ‘인류보완계획’을 철회한다.

: 결말에 대한 해석, “기분 나빠.”

‘인류보완계획’이 철회된 후, ‘신지’는 ‘아스카’와 단 둘이 조우한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환상과 난해한 연출 속에서 드디어 끝이 나는 건가? 싶을 때,
냅다 ‘아스카’의 목을 조르는 돌발행동을 저지른다.

‘아스카’는 의식을 차리고 눈물을 흘리는 ‘신지’를 위로해준다.

그러면서 또 행동과 정반대의 대사를 뱉으며 작은 마무리 된다.

“기분 나빠.”

처음 이 대사를 들었을 때 머리가 깨지는 줄 알았다.
나름대로 이해를 하면서 보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런 대사로 마무리 지으니 순간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싶었다.

‘신지’는 ‘인류보완계획’이 실행되는 동안 타인의 마음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도 모두 드러났다.

‘타인’에 대한 공포로 모든 것을 놓았다가 이내 다시금 ‘타인’과의 관계를 받아들인다.
즉, 우리 인간 사이에 다시 ‘AT필드’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극복할 수는 없다.
한순간에 모든 깨달음에 이를 수도 없다.

그렇기에 ‘신지’는 ‘아스카’를 발견하자 반사적으로 목을 졸랐던 게 아닐까?
‘아스카’를 향한 목조름이 아닌, ‘타인’으로 인식하고 순간의 두려움에 ‘타인’을 향한 목조름이지 않았을까?

‘아스카’는 그런 ‘신지’를 밀어내지 않는다.
여태까지 공격적으로 ‘신지’를 쏘아붙였던 그녀는 오히려 ‘신지’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목을 조르던 ‘신지’는 그 손길에 눈물을 터트린다.

‘타인’을 향한 공포가 ‘아스카’가 보여주는 ‘사랑’의 힘으로 무장해제 되는 순간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기분 나쁘다.’는 한 마디로 끝이 난다.

이는 단순한 거절도, 단순한 혐오도 아니었을 것이다.

‘인류보완계획’ 속에서 서로의 가장 추하고 숨기고 싶었던 마음까지 모두 들여다본 두 사람이
다시 현실에서 마주한 순간의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아스카’는 ‘신지’를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의 모든 행동과 상처를 한 순간에 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 또한 ‘신지’라는 ‘타인’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했더라도 그 관계가 한 번에 완전해지지는 않는다.

즉, ‘신지’의 목조름이 ‘아스카’가 아닌 ‘타인’을 향했듯,
‘아스카’의 “기분 나빠.” 역시 ‘신지’가 아닌 ‘타인‘을 향한 한 마디가 아니었을까?

‘인류보완계획’이 철회되고 필연적으로 우리 사이에는 다시 ‘AT필드’가 생겼으니까.

결국 두 사람 사이의 ‘AT필드’는 사라지지 않았다.

‘신지’는 여전히 두려워했고, ‘아스카’ 역시 여전히 상처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스카’는 그의 뺨을 어루만졌고, ‘신지’는 목을 조르던 손을 놓았다.

완전한 이해도, 완전한 용서도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를 다시 ‘타인’으로 마주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인류보완계획’이 보여줄 수 없었던 아주 작은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희망의 씨앗은,
끝내 다시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

간략하게 해석을 쓰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고봉밥이 되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나왔던 애니메이션이었고 단순히 명작이라고만 들어서
그냥 외계 생명체 때려잡는 메카물인 줄 알았다가 굉장히 당황했다.

사실 명작하면 꼭 나오는 작품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설득력을 가질까?
하면 아니라는 생각은 한다.

과도할 정도로 난해하고, 결국 TVA 하나만으로는 모든 것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기도 했으니까.

그럼에도 나는 재밌게 본 작품이다.

특유의 그 암울한 분위기와 인물들의 묘사, 매력적인 캐릭터 디자인, 훌륭한 사운드 등
(‘아스카’와 ‘레이’의 디자인은 지금 봐도 촌스러움이 하나도 안 느껴진다.)
그 오타쿠의 무언가를 제대로 자극하는 작품이지 않나 싶다.

꼭 해석에 매몰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보아도 재밌는 작품이다.

반대로 이 작품이 말하고 싶은 바에 하나하나 접근하며
갖은 결핍을 안은 캐릭터들을 이해하고
타자와의 관계에 집중하다보면 또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솔직히 아무한테 세기의 명작이라고 섣불리 추천할 수는 없을 것 같으나,
누가 본다고 한다면 말리지는 않을 거다.
글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정리하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나’라는 존재를 유지시킴과 동시에
타인과의 벽을 형성하는 ‘AT필드’, 즉 인간관계에 대한 고뇌를 담은 작품이다.

‘나’라는 존재를 포기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나’라는 존재를 인정함과 동시에 ‘너’라는 타인에 대해 공포감을 느껴 도망 칠 것인가?

‘너’와 ‘나’ 사이의 벽은 절대 극복되지 못하고 우리는 결국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그럼에도 타인과 교감하며 이 벽을 극복해 나아갈 것인가?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극복은 결국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랑’은 일방적이지도 않고, 육체적인 것만도 아니다.
상호적인 것이며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고,
육체적인 것과 함께 성숙한 정신적인 관계도 동반되는 소중한 것임을,
그게 우리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임을 말한다.

또한 그 ‘사랑’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타인’이라는 존재를 인정해야만 한다.
알 수 없는 ‘타인’이라는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더라도,
‘나’라는 존재가 이해받고 싶은 만큼, ‘너’라는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며 우리는 작지만 분명한 첫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AT필드’를 품은 채 살아가는 방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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