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포스팅은 작품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작성하였습니다.
때문에 개인적인 의견과 스포가 매우 매우 매우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립니다.
최진영이란 작가를 알게 된 계기이자 최진영 작가에게 푹 빠지게 된 작품이다.
질리도록 일었고, 아직까지도 전혀 질리지 않는 작품이다.
별 다른 이유 없이 문득 또 읽고 싶어져서 읽게 됐다.
<간략한 줄거리>
사회에서 전혀 보호 받지 못한 ‘구’와 ‘담’의 이야기다.
‘구’와 ‘담’의 시점을 교차해가며 서술해나가는 이 작품은,
너무나 사랑스럽다 못해 애절하기도, 풋풋하기도 하다.
이와 동시에 참혹한 세상에 덩그러니 놓인 가슴 아픈 이야기다.
: 수많은 장애물을 초월한 사랑
작품의 장르를 로맨스라 봐도 무방하다.
‘구’와 ‘담’의 시점을 교차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천천히 훑어 간다.
같은 사건 두 인물의 시점에서 번갈아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는 ‘구’와 ‘담’의 마음을 모두 이해하게 된다.
서로가 어떤 오해를 하고, 어떤 감정을 숨기며, 어떤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보지는 알기에
두 사람의 감정선에 더욱 깊이 몰입할 수 있다.
‘구’와 ‘담’은 언제나 서로를 가장 먼저 생각했고 끝까지 사랑했다.
그 사랑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일 정도로 순수하다.
어쩌면 판타지처럼 느껴질 만큼 변하지 않는 사랑이기에 더욱 눈길이 갔다.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법한 사랑이 이 작품 안에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랑이 순탄하진 않았다.
‘구’와 ‘담’은 첫 만남부터 수많은 장애물과 마주한다.
어린 시절에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놀림을 받았다.
그 수준은 아이의 순진한 장난을 넘어 온갖 모욕으로 날라왔고 어른들은 ‘구’와 ‘담’의 말을 귀담지 않았다.
다음은 ‘노마’의 죽음으로.
이 다음은 ‘구’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누나로.
그 다음은 ‘구’의 부모가 물려준 빚으로부터.
마지막은 ‘구’의 죽음으로.
상실과 가난, 빚과 죽음이라는 현실이 둘을 끊임없이 갈라놓는다.
그 시간은 몇 년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구’와 ‘담은 서로를 놓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는 하나만으로 상대를 떠올리고 상상하며 버텨냈다.
갈등이 찾아올 때면 서로를 의심하기보다 자신의 사랑을 먼저 돌아본다.
속으로 원망도 하고 미워도 하고 질투도 하지만 다시 서로의 자리를 돌아온다.
‘구’와 ‘담’을 보고 있으면 괜히 설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외로워지기도 했다.
최진영 작가의 문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담백하다.
문장의 호흡이 짧고, 화려한 비유나 과장된 표현도 거의 없다.
그 담백함 덕분에 인물들의 감정은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단순히 “널 사랑해.”라고 말하기보다,
“나는 지금 구가 보고 싶다. 아니 안 보고 싶다. 보고 싶으면서도 안 보고 싶다.”
처럼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사람의 마음은 결코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미워하면서도 그리울 수도 있다.
최진영 작가는 그런 흔들리는 감정을 꾸며내지 않고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 현실적이고, 그래서 더욱 마음에 남는다.
내가 최진영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다.
꼭 이 『구의 증명』만의 얘기가 아니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렇다.
현실의 냉혹함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거기에는 백마 탄 왕자님 같은 존재는 없다.
대개 여전히 성장 중인 청소년들이 주인공들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묵묵이 삶을 살아간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화려한 어휘나 문장보다는
그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그려낸다.
그리고는 함부로 힘내라고 하지 않는다.
‘힘내’라는 말 한 마디로 이 세상이 변하지 않음을 알기에.
나를 힘들 게 하는 것들이 거품처럼 살아지고 기적이란 것이 쉽게 오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럼에도 살아보자고 한다.
단순히 ‘힘내.’라는 말 한 마디를 보태는 게 아니라 ‘같이’ 살아보자고.
너가 걸을 때 옆에서 같이 걷겠다고 하는 최진영의 글쓰기가 난 참 좋다.
: 담의 선택. 기괴하다는 표현 하나로 끝낼 수 있을까?
로맨스로 소개를 했지만 단순히 순정만화처럼 읽으면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 작품에서 결국 ‘담’은 ‘구’의 시체를 먹는 것을 택하기 때문이다.
‘구’와 ‘담’의 이야기는 사랑스러울지 몰라도
이 둘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마냥 밝지 않다.
어둡다 못해 참혹하기에 읽는 내내 찜찜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구’는 집안의 생계가 힘들어 학생 때부터 밤새 일을 하며 생계에 보탬이 되려 한다.
군 전역을 한 후엔, 부모님은 온데간데 사라졌고, 부모님의 사채가 전부 ‘구’로 떠넘겨지게 된다.
그 사이 원금보다 이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그런 사채 빚이다.
‘담’ 또한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이모 아래서 성실하게 큰다.
그러나 이모 또한 병을 앓고 한순간에 이모마저 세상을 떠나고 만다.
때문에 이 둘은 “삶”을 살아간다기보단 ‘생존’해간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어린 이 두 인물을 지켜줄 어른도, 사회도, 시스템도,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세상은 한순간에 우리의 소중한 사람을 데리고 간다.
‘담’과 ‘구’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던 ‘이모’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담’과 ‘구’의 유일했던 친구 어린 ‘노마’는 교통사고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은 늘 우리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
오히려 불가항적인 ‘상실’과 ‘고통’을 남기고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 세상 아래 발현한 사회 또한,
절실하게 보호가 필요한 이들에게는 허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채업자에게 쫓기다 결국 ‘구’까지 세상을 뜨고, 홀로 남은 ‘담’의 선택은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시선으로 보면 ‘담’의 행동은 전혀 이해 받을 수 없다.
그저 정신에 문제가 생긴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다.
‘담’ 역시 스스로의 행동을 확신하지 못 한다.
사람이란 뭘까?
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흉악범인가. 나는 사이코인가. 나는 변태성욕자인가. 마귀인가. 야만인인가. 식인종인가. 그 어떤 범주에도 나를 완전히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인가. (163쪽)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쉽게 ‘담’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진 못하리라 생각한다.
‘구’와 ‘담’은 사람들로부터, 사회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잊혀지고 소외된 존재다.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만약 ‘담’마저 ‘구’를 놓아버린다면, ‘구’는 세상에 존재했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완전히 소멸해버릴 것이다.
언젠가 ‘구’가 말했던 “난 너가 죽으면 너를 먹을 거야.”라던 말을 역으로 지켜준 것이기도,
끝까지 ‘구’와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구’를 끝까지 기억하기 위함이기도,
홀로 남은 ‘담’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할 것이다.
‘구’를 천천히 먹는 ‘담’ 또한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
이 비참함 세상 속에서 ‘담’에게 다른 선택이나 고민따위는 사치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장례를 치를 돈도, 묻어줄 땅도, 어디에 말할 곳도, 같이 슬퍼할 사람도, 슬픔을 느낄 시간도 없는 ‘담’.
그녀를 보고 있자면 ‘담’의 행동을 단순하게 잔인함과 기괴함으로 치부할 수 없다.
묵묵히 ‘담’과 ‘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 구의 증명, 왜 담의 증명이 아니었을까?
작품은 ‘구’의 죽음으로 시작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담’이다.
도중도중 ‘구’와 ‘담’이 교차로 등장하지만,
‘담’이 이야기를 이끌고, ‘구’가 그런 ‘담’을 지켜보며 코멘트를 다는 형식이다.
‘구’의 시신를 지키고, ‘구’를 먹고, 끝까지 ‘구’를 기억하는 것은 ‘담’인다.
근데 왜 제목은 『구의 증명』이었을까?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은 ‘담’이 주체로 ‘구’의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한다.
작품 속 ‘담’의 일련의 행동들은 철저히 “구가 여기 존재했었다.”는 절박한 외침에 가깝다.
하지만 그런 ‘담’ 역시 사회로 소외를 당한 인물이고,
‘구’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혼자가 된 인물이다.
그렇다면, 홀로 남은 ‘담’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구’의 몫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구’는 죽었지만, 사라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담’을 쭉 지켜본다.
‘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의 눈으로 지켜본다면 그저 미친 사람일 뿐이다.
그녀의 처절한 노력을 알아주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랑임을 느끼는 건,
역설적으로 죽은 이후에 공(空)의 세계에 남은 ‘구’밖에 없으니까.
‘담’은 끝까지 ‘구’를 증명했고,
이제 그런 ‘담’의 존재는 ‘구’의 증명으로 완성된다.
또한, ‘증명’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인물의 존재를 끝까지 지켜낸다는 의미다.
서로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건 ‘구’와 ‘담’ 둘 뿐이었으니까.
이 둘이 어디선가 다시 만난다면, 그게 설령 천 년의 시간이 흐른 뒤라도,
서로에 대한 존재를 서로가 끝까지 증명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
은근 내 주변에서는 호불호가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는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최진영 작가를 알게 되고,
그 뒤로 『이제야 언니에게』, 『해가 지는 곳으로』, 『비상문』,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를 쭉쭉 읽었던 때가 지금도 기억난다.
왜 최진영 작가의 작품은 늘 암울하고 불행하냐고 말한다.
때로는 좀 과하지 않냐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히 지금도 그렇게 소외된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고,
그 존재에 귀를 기울이려는 작가의 글이 난 좋다.
그럼에도 같이 살아보자는 작가의 목소리가,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하자는 그 목소리가 난 좋다.
나의 미래는 오래 전에 개봉한 맥주였다. 향과 알코올과 탄산이 다 날아간 미적지근한 그 병에 뚜껑만 다시 닫아놓고서 남에게나 나에게나 새 것이라고 우겨대는 것 같았다. (90쪽)
아버지가 주는 술을 마신다는 것이 수긍의 악수처럼 느껴졌다. 당신이 내게 넘기는 짐을 잘 받겠다는 악수. 당신을 이해한다는 악수. (98쪽)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163쪽)
혹시라도 너의 무표정을 보게 될까봐 겁이 났다. ‘안녕’하고 말했는데 ‘안녕’으로만 끝날까봐. (16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