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의 리뷰

영화 <양들의 침묵> 해석. 제목과 영화 포스터의 의미 해석.

※본 포스팅은 작품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작성했습니다.
때문에 개인적인 의견과 스포가 매우매우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정보
제목 : 양들의 침묵 (The Silence of the Lambs, 1991)
감독 : 조나단 드미
출연 : 조디 포스터, 안소니 홉킨스, 스콧 글렌 등
장르 : 범죄/스릴러
러닝타임 : 119분

근래 영화 <스위니 토드 : 어느 잔혹한 이발사 이야기>와 파트리크 쥐스킨 소설 『향수』를 봤다.
미치광이 캐릭터들을 연거푸 보다 보니, ‘한니발’도 다시 보고 싶어져 또 찾게 되었다.


<간략한 줄거리>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는 상관 ‘잭 크로포드’로부터 연쇄 살인마 ‘버팔로 빌’ 사건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잭 크로포드’는 명령과 함께, 사건의 실마리를 알려줄 사람이 있다며 그 사람을 찾아가라고 한다.

그 사람은 ‘한니발’로, 유명한 정신과 박사였으나 현재는 식인 행위로 인해 수감되어 있었다.
그렇게 ‘클라리스’는 ‘한니발’을 찾아가게 되고, 그와 위험한 만남을 시작한다.


: <양들의 침묵>. 침묵한 양은 무엇을 말할까?

양에 관한 이야기는 작 중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클라리스’는 어린 시절 목장에 맡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얼마 있지 못하고, 목장을 도망치게 되는데 그 원인은 양들의 비명소리였다.

어느 날 목장에서 어린 아이 입에서나 나올 법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비명소리를 따라가보니 이제 막 태어난 어린 양들이 도살 당하고 있었다.

어린 ‘클라리스’는 그들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아무런 힘이 없어 겨우 한 마리를 들고 도망친다.
하지만 그 한 마리조차 ‘클라리스’에게는 너무 무거웠다.

‘클라리스’는 얼마 못 가 결국 경찰한테 붙잡히고, 그 한 마리마저 죽임을 당한다.

‘양’은 ‘클라리스’의 ‘선’ 또는 ‘순수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순수함은 너무나 무력했고, 너무나 무거웠다.
양(순수함)은 쉽게 도축을 당한다.
어린 ‘클라리스’는 그 양을 단 한 마리라도 지키려고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클라리스’의 트라우마로 남아 ‘양’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한다.

‘양(순수)’를 지키려고 했고, 지키지 못해 괴로워하던 ‘클라리스’는 ‘한니발’을 만나며 조금씩 무너진다.

영화 초반 ‘한니발’이 ‘클라리스’에게 ‘버팔로 필’에 관한 힌트를 준다.

‘유어 셀프’라는 물품 보관소에서 자신의 환자였던 ‘해스터 모펫’을 찾으라고 한다.
‘헤스터 모펫(Hester Mofet)’은 일종의 애너그램(언어유희)으로서 ‘The rest of me’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나의 일부’를 찾으라는 뜻이었다.

그곳에서 ‘클라리스’는 목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시체를 발견한다.
다른 신체의 일부라는 힌트를 알아차리고 미궁 속이었던 사건을 수월하게 조사해간다.

‘한니발’은 창고에서 돌아온 ‘클라리스’에게 시체를 본 심정은 어떠냐고 물었다.
‘클라리스’의 대답은 처음엔 무섭다가 다음엔 흥분됐다고 한다.

즉 이 씬은 단순히 사건에 대한 수사가 아닌 작 중에서 중요한 하나의 거대한 메타포였다.

‘유어셀프’, ‘헤스터 모펫’, 그후 ‘클라리스’의 심정.

‘한니발’은 ‘클라리스’에게 너 스스로(유어셀프) 너의 내면에서 나의 일부(헤스터 모펫)을 찾아보라고 한다.
‘클라리스’는 잔혹한 신체의 일부를 보고 난 뒤 두렵다가 결국 흥분을 하게 됐다.

‘양(순수 또는 선)’을 지키지 못해 괴로워했던 ‘클라리스’ 내면에는 ‘한니발’과 비슷한 면이 있음 말한다.

영화 후반 ‘버팔로 빌’을 마주하고 그를 사살한 ‘클라리스’는 마침내 양들의 비명소리가 그쳤다고 한다.

‘클라리스’의 상관 ‘잭 크로포드’는 ‘한니발’에게 속마음을 비추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리고 그러한 ‘클라리스’ 내면에 있던 ‘악’‘욕구’는 ‘한니발’에게 한 번에 파악되었던 게 아닐까?
그렇게 ‘클라리스’가 끝까지 지켜려 했던 ‘양’들은 ‘침묵’하게 된다.


: 화려하면서도 기괴한 포스터. 이 안에서도 힌트는 숨어있다.

[in voluptas Mors(1951)]

이러한 제목에 대한 해석은 포스터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클라리스’ 입에 나방 한 마리가 자리하고 있다.

나방을 자세히 살펴보면 해골처럼 생긴 문양이 있다.
이는 유명 화가 ‘살바도르 달리’[in voluptas Mors(1951)]라는 작품이다.

‘관능적인 죽음’이라는 뜻인 이 작품은 일곱 명의 여인이 나체로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는 영화적으로 ‘버팔로 빌’에게 희생된 여인들을 보여주며 다시 말해 ‘버팔로 빌’ 사건을 의미한다.

그 사건을 등에 지고 있는 나방이 ‘클라리스’의 입을 틀어막고 있다.

‘클라리스(=양 = 순수함)’는 그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는 비명소리가 그치게 됐다.

나방인 이유는 ‘변태’라는 특징을 은유한 게 아닐까?
‘한니발’ 만남 이후 번데기를 깨고 숨어져 있던 ‘클라리스’ 내면이 꺼내져 나왔음을 말한 게 아닐까?


: 단 16분. ‘한니발’이 관객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던 시간.

<양들의 침묵>은 ‘클라리스’가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결국 관객들 기억에 남는 건 ‘한니발’의 영화라는 점이다.

그 만큼 이 작품은 ‘한니발’의 손 안에서 움직이고 조율된다.

또한 ‘한니발’을 연기한 ‘홉킨스’의 연기는 더욱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입체적인 악인의 형상, 매력적인 분위기, 강렬한 카리스마, 독특한 캐릭터.
영화계에서 악인/빌런을 뽑으면 ‘조커’, ‘안톤 시거’와 함께 빠지지 않는 인물이라 당연코 말할 수 있다.

때문에 그만큼 이 영화에서 ‘한니발’의 존재감은 매우 거대하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막상 이 영화에서 ‘한니발’이 등장한 시간은 대략 16분밖에 되지 않는다.

119분이라는 러닝타임 속에서 단 16분만으로 이 영화의 주인이 ‘한니발’이라고 확실하게 말한다.

이는 글로는 전혀 표현이 안 되기에 만약 아직 보지 못 했다면 이 영화만큼은 꼭 한 번 봤으면 좋겠다.

‘한니발’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하나 더 얘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오버 리딩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다 보면, ‘한니발’은 시종일관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마치 카메라 너머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이는 연출 면에 있어 굉장히 금기 또는 기피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스크린 안에서 움직여야 할 인물들이 제4의 벽을 깨고 관객을 응시하는 느낌을 주면 영화적 몰입을 헤칠도 모르기 때문이다.
때문에 절대다수의 작품들은 의도적으로 인물들의 시선을 카메라 정면으로 받지 않는다.

‘한니발’은 그대로 우리를 응시한다.

단순히 공포감 조성이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단지 그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 중 ‘클라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은 저마다의 순수함을 지킨다.
순수함이라는 거창한 게 아니더라도 정해진 사회적 규율을 지키려고 애쓴다.
도덕과 규범과 규율을 어긴 사람들을 나무란다.
배려와 양보와 예의의 선함을 인간의 당연한 도리로 여긴다.

허나 ‘한니발’은 ‘클라리스’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지그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너희도 나랑 크게 다르지 않다고.

너희도 내면에서 누구를 욕하잖아. 탐하잖아. 즐겁잖아. 흥분되잖아.
아닌 척 하지마. 라고.

어쩌면 우리 또한 ‘잭 크로포드’의 조언을 지키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린 이미 ‘한니발’에게 속마음을 모두 읽힌 게 아닐까?

(여담으로 이런 연출을 우리나라 명작 중 하나인 <살인의 추억>에서도 사용된 기법이다. <살인의 추억>의 명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는 당시 ‘박두만’ 역의 ‘송강호’가 스크린 너머 이 영화를 보고 있을 실제 범인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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